트렌트호 사건, 북군의 영국 우편선 나포와 미영 전쟁 위기
1861-11-08 — 1862-01-14
최종 갱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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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861년 11월 미국 남북전쟁 중 북군 군함 샌재신토호가 영국 우편선 트렌트호를 공해상에서 세워 남부연합 특사 제임스 메이슨과 존 슬라이델을 끌어내자, 영국이 중립국 선박 침해로 반발해 캐나다에 대규모 병력을 보내며 미영 전쟁 직전까지 간 외교 위기다.
2. 전개 과정[편집]
10개 기록 · 1861-10-12 ~ 1862-01-14
남부연합 특사 메이슨·슬라이델, 찰스턴을 빠져나가다
1861년 10월 12일 남부연합 정부가 영국과 프랑스에 파견하는 특사 제임스 메이슨과 존 슬라이델이 봉쇄를 뚫고 찰스턴을 출발해 쿠바 방면으로 향했다. 두 사람은 유럽 열강이 남부연합을 승인하고 면화 수출 길을 열도록 설득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이들은 증기선 시오도라호를 타고 북군 봉쇄선을 돌파했고 쿠바에서 영국 우편선을 갈아타 유럽으로 건너갈 계획이었다. 북부 정부는 이들이 영국과 프랑스에 외교적 승인을 받아내면 전쟁의 판도가 바뀔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 움직임이 곧 해상 충돌의 불씨가 되었다.
메이슨 일행, 아바나에서 영국 우편선 트렌트호에 승선하다
1861년 11월 7일 메이슨과 슬라이델은 비서관들, 슬라이델의 아내와 자녀들과 함께 쿠바 아바나에서 영국 왕립 우편선 트렌트호에 올랐다. 트렌트호는 영국 선적의 중립국 우편선으로 영국령 서인도제도를 거쳐 영국으로 가는 정기 항로를 운항하고 있었다. 이 사실은 아바나에 있던 북군 군함 샌재신토호의 찰스 윌크스 함장에게 알려졌다. 윌크스는 국제법 해석을 두고 상부의 명시적 지시 없이 스스로 이들을 가로막기로 결심했다. 그는 이 행동이 북부에 큰 외교적 부담을 안길 수 있음을 충분히 따져보지 않았다.
샌재신토호, 바하마 해협에서 트렌트호를 세우고 특사를 체포하다
1861년 11월 8일 바하마 해협에서 샌재신토호가 두 차례 경고 사격을 한 뒤 트렌트호를 정지시켰다. 윌크스는 페어팩스 중위를 보내 승선시켜 메이슨과 슬라이델 등 4명을 체포해 샌재신토호로 옮겼다. 트렌트호 자체는 억류하지 않고 항해를 계속하게 했는데, 이는 선박을 나포해 해사 법원에 넘기는 국제법상 절차를 지키지 않은 것이었다. 영국은 중립국 선박에서 승객을 강제로 끌어내린 행위를 영국 국기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샌재신토호는 포로들을 싣고 미국 버지니아 햄프턴 로즈로 향했다.
북부 사회가 윌크스를 영웅으로 환호하다
샌재신토호가 11월 15일 햄프턴 로즈에 도착하자 소식이 11월 16일 신문에 오르며 북부 전역이 환호에 휩싸였다. 연이은 패전 소식에 지쳐 있던 북부 여론은 윌크스를 영웅으로 칭송했고 신문들은 남부 특사를 붙잡은 승리를 대서특필했다. 12월 2일 하원은 윌크스에게 감사를 표하고 금메달 수여를 제안하는 결의를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이 열광은 곧바로 링컨 행정부에 정치적 족쇄가 되어, 특사를 석방하면 윌크스를 부정하는 것처럼 비칠 상황을 만들었다. 한편 국무장관 윌리엄 수어드는 사건의 국제법적 위험을 인식하고 신중하게 대응책을 고민했다.
영국에 소식이 전해지자 분노가 폭발하다
1861년 11월 27일 영국 런던에 트렌트호 나포 소식이 알려지자 정부와 여론이 일제히 격분했다. 11월 29일 긴급 내각 회의가 소집되었고 팔머스턴 총리는 즉각적인 석방과 공식 사과를 요구하는 단호한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당시 영국 해군은 세계 최강으로 미국 해안 봉쇄를 위협할 수 있는 처지였다. 영국 언론은 미국이 영국 국기를 모욕했다며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는 논조를 쏟아냈다. 반면 남부연합은 이 위기가 영국의 개입을 끌어내는 호재가 될 수 있다고 기대했다.
앨버트 공이 영국 최후통첩 초안을 완화하다
1861년 11월 30일 장티푸스를 앓고 있던 빅토리아 여왕의 부군 앨버트 공은 정부가 작성한 대미 문서 초안을 검토해 표현을 누그러뜨렸다. 그는 미국이 윌크스의 행동이 정부의 승인 없이 이뤄진 것이라고 선을 그을 수 있도록 공식 사과 없이도 물러설 여지를 두는 문구를 제안했다. 이 수정은 링컨 정부가 체면을 잃지 않고 사건을 매듭지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준 것으로 평가된다. 앨버트 공은 곧 같은 해 12월 14일 사망해 이 개입은 그의 마지막 주요 정치적 역할 중 하나가 되었다. 완화된 공문은 12월 초 미국으로 전달되었다.
영국, 캐나다에 소총과 병력을 급파하다
영국 정부는 전쟁 가능성에 대비해 12월 초부터 캐나다 방어를 강화했다. 12월 6일 엔필드 소총 3만 정이 수송선 편으로 캐나다로 향했고 12월 9일에는 전쟁 준비를 조율하는 특별위원회가 열렸다. 12월 25일 무렵 영국은 수송선 18척으로 약 1만 1천 명의 병력을 캐나다에 보냈고 추가로 2만 8천 명 이상 파병 계획을 세워 두었다. 겨울철이라 세인트로렌스강이 얼어 병력은 핼리팩스와 세인트존에서 육로로 이동해야 했다. 영국의 대규모 군사 준비는 미국에 사태의 심각성을 분명히 각인시켰다.
영국 정부 문서가 워싱턴에 도착하다
영국 정부의 공식 답신이 12월 18일 워싱턴에 도착했다. 문서는 영국 국기에 대한 모욕을 지적하며 특사 4명의 석방과 적절한 사과를 요구했다. 링컨 내각은 곧 이 문제를 다루는 회의를 거듭했고 이미 12월 15일 무렵부터 영국이 강경 입장이라는 소식이 미국에 퍼지고 있었다. 의회에서는 억류를 유지하자는 결의가 109 대 16으로 부결되는 등 강경론이 약화되었다. 북부는 남부와 영국을 동시에 상대하는 두 개의 전선을 감당할 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링컨 행정부, 특사 석방과 윌크스 행위 부인을 결정하다
1861년 12월 26일 링컨 행정부는 메이슨과 슬라이델을 석방하고 윌크스의 행동이 정부의 지시가 아니었음을 밝히기로 결정했다. 국무장관 수어드는 윌크스가 트렌트호를 정식으로 나포해 해사 법원에 넘기지 않은 점을 절차상 흠결로 지적하는 논리를 택해, 영국이 오랫동안 주장해 온 중립국 선박 불가침 원칙을 미국이 인정하는 모양새를 갖췄다. 영국에는 공식 사과 대신 이런 법리 설명이 전달되어 양측이 체면을 지킬 수 있었다. 링컨은 한 번에 한 전쟁만 한다는 취지로 신중론을 택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결정으로 영국의 군사 개입 위험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메이슨·슬라이델 석방, 위기가 평화적으로 끝나다
1862년 1월 14일 메이슨과 슬라이델이 석방되어 영국 군함에 인도되었고 두 사람은 유럽으로 항해를 이어갔다. 영국은 이 결과를 외교적 승리로 받아들였고 전쟁 준비를 점차 거두었다. 이 위기 동안 영국이 캐나다에 보낸 병력은 장교 약 900명과 정규군 약 1만 7천 명에 달했다. 특사들은 유럽에 도착했지만 영국과 프랑스의 남부연합 승인이라는 목표는 이루지 못했다. 사건은 남북전쟁 중 유일하게 미영 전쟁 직전까지 간 위기로 기록된다.
3. 같이 보기[편집]

자주 묻는 질문
- 트렌트호 사건, 북군의 영국 우편선 나포와 미영 전쟁 위기, 어떤 사건인가요?
- 1861년 11월 미국 남북전쟁 중 북군 군함 샌재신토호가 영국 우편선 트렌트호를 공해상에서 세워 남부연합 특사 제임스 메이슨과 존 슬라이델을 끌어내자, 영국이 중립국 선박 침해로 반발해 캐나다에 대규모 병력을 보내며 미영 전쟁 직전까지 간 외교 위기다.
- 트렌트호 사건, 북군의 영국 우편선 나포와 미영 전쟁 위기, 언제 일어났나요?
- 1861-11-08부터 1862-01-14까지 이어진 사건입니다.
- 트렌트호 사건, 북군의 영국 우편선 나포와 미영 전쟁 위기, 지금 상태는 어떤가요?
- 종결된 사건입니다. 1862-01-14에 마무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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