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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외교종결

피그스만 침공 실패, 케네디 행정부의 CIA 쿠바 상륙작전 참패

1960-03-17 — 1962-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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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961년 4월 17일 미 CIA가 훈련시킨 쿠바 망명자 부대 2506여단 1,400여 명이 쿠바 피그스만에 상륙했으나 카스트로군에 사흘 만에 패배해 114명이 숨지고 1,202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케네디 행정부가 외교적 타격을 입고 쿠바가 소련과 더 밀착한 사건이다.

2. 전개 과정[편집]

8개 기록 · 1960-03-17 ~ 1962-12-21

19601건
  1. 아이젠하워, 카스트로 정권 교체를 목표로 한 CIA 계획 승인

    1960년 3월 17일 CIA는 쿠바 카스트로 정권을 대체하는 것을 목표로 한 계획을 국가안전보장회의에 제출했고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를 승인했다. 승인된 예산은 1,300만 달러였다. 이 계획은 쿠바 망명자를 훈련시켜 반카스트로 무장 세력을 만드는 것이었다. 같은 해 쿠바는 미국계 자산을 접수하고 소련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 시기 승인은 이후 케네디 행정부로 넘어가 피그스만 작전으로 이어졌다.

19615건
  1. CIA 제공 B-26 폭격기, 쿠바 공군기지 선제 공습

    1961년 4월 15일 CIA가 제공한 B-26 폭격기 8대가 쿠바 공군기지를 공습했다. 목적은 쿠바의 공군력을 무력화해 상륙 부대를 보호하는 것이었으나 완전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공습 이후 쿠바 정부는 미국의 개입을 국제사회에 알렸고 미국은 공식적으로 관련성을 부인했다. 이 때문에 상륙 직전부터 작전의 은밀성이 훼손되었다. 쿠바는 곧 침공 가능성에 대비해 경계를 높였다.

  2. 2506여단 1,400여 명, 플라야 히론 상륙

    1961년 4월 17일 과테말라와 니카라과에서 출발한 CIA 훈련 쿠바 망명자 부대인 2506여단이 피그스만의 플라야 히론에 상륙했다. 병력은 1,400여 명이었고 쿠바 민주혁명전선의 무장 조직 성격이었다. 이들은 상륙 후 쿠바 주민의 봉기를 기대했지만 대규모 호응은 나타나지 않았다. 카스트로의 민병대와 정규군은 신속히 반격에 나섰다. 케네디 대통령은 추가 공중 지원을 제한해 작전의 성공 가능성이 크게 낮아졌다.

  3. 상륙군 항복, 사망 114명·포로 1,202명

    1961년 4월 20일 상륙한 2506여단은 사흘 만에 항복했고 생존자들은 모두 쿠바군에 붙잡혔다. 위키백과 집계로 여단의 사망자는 114명, 부상자는 360명, 포로는 1,202명이었다. 쿠바군은 176명이 숨지고 민병대까지 합쳐 약 2,000명이 죽거나 다쳤다고 알려졌다. 미국 측 사망자도 4명 있었고 B-26 폭격기 2대와 보급선 2척이 손실되었다. 케네디는 이 작전을 미국 외교정책의 실패로 인정했다.

  4. 케네디, 공개적으로 책임 인정

    1961년 4월 21일 케네디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침공 실패에 대한 최종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이 발언은 정치적 위기를 완화하는 효과가 있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실패 이후 CIA 지도부는 책임 추궁을 받았고 앨런 덜레스 국장과 리처드 비셀 등이 이후 자리에서 물러났다. 행정부 내부에서는 정보와 작전 계획의 허점을 검토하기 위한 별도 조사가 이루어졌다. 이 사건은 케네디가 이후 위기에서 군과 정보기관의 판단을 더 신중히 따지게 만든 계기로 평가된다.

  5. 후속 비밀 공작인 몽구스 작전 출범

    1961년 11월 미국은 쿠바 정권 교체를 노리는 비밀 후속 프로그램인 몽구스 작전을 출범시켰다. 에드워드 랜스데일이 총괄한 이 작전은 정치와 심리 및 군사 그리고 사보타주를 아우르는 다층 계획이었다. 랜스데일은 1962년 2월 20일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에게 6단계 계획을 보고했다. 작전은 1962년 10월 소련 미사일 위협이 불거지면서 중단되었다. 피그스만 실패 이후에도 미국의 쿠바 개입 의지가 이어졌다는 점을 보여 준다.

19622건
  1. 쿠바, 포로 1,179명 재판 후 4월 7일 30년형 선고

    1962년 3월 29일 쿠바는 포로가 된 침공군 1,179명을 반역 혐의로 재판에 회부했다. 피고 전원이 유죄 판결을 받고 4월 7일 30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4월 14일에는 부상자와 병든 포로 60명이 미국으로 석방되었다. 포로 중에는 농장주와 건물주와 공장주 및 사업가 등 부유층이 상당수 포함되어 쿠바 정부가 이를 선전에 활용했다. 이후 포로의 운명은 미국과 쿠바 사이의 협상 의제가 되었다.

  2. 도노반 협상 타결, 포로 1,113명 석방 대가로 5,300만 달러 상당 식량·의약품

    1962년 12월 21일 카스트로와 미국인 변호사 제임스 도노반은 협상을 타결해 포로 1,113명을 5,300만 달러 상당의 식량과 의약품과 교환하기로 합의했다. 대금은 민간 기부와 세제 혜택을 노린 기업들의 기부로 마련되었다. 쿠바 미사일 위기가 막 지나간 시점이어서 이 합의는 미국과 쿠바 관계에 작은 긴장 완화로 읽혔다. 석방된 병사들은 미국으로 돌아와 이후 반카스트로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이 합의로 피그스만 침공의 직접적 후속 사태는 마무리되었다.

3.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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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묻는 질문

피그스만 침공 실패, 케네디 행정부의 CIA 쿠바 상륙작전 참패, 어떤 사건인가요?
1961년 4월 17일 미 CIA가 훈련시킨 쿠바 망명자 부대 2506여단 1,400여 명이 쿠바 피그스만에 상륙했으나 카스트로군에 사흘 만에 패배해 114명이 숨지고 1,202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케네디 행정부가 외교적 타격을 입고 쿠바가 소련과 더 밀착한 사건이다.
피그스만 침공 실패, 케네디 행정부의 CIA 쿠바 상륙작전 참패, 언제 일어났나요?
1960-03-17부터 1962-12-21까지 이어진 사건입니다.
피그스만 침공 실패, 케네디 행정부의 CIA 쿠바 상륙작전 참패, 지금 상태는 어떤가요?
종결된 사건입니다. 1962-12-21에 마무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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