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거뱅크 사건, 러시아 발트함대의 영국 어선 오인 포격
1904-10-22 — 1905-02-25
최종 갱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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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904년 10월 러일전쟁 중 극동으로 항해하던 러시아 발트함대가 북해 도거뱅크 해역에서 일본 어뢰정으로 착각해 영국 헐 항 트롤 어선단에 포격을 가해 어민 2명이 숨지고 영국과 러시아가 전쟁 직전까지 간 외교 위기로, 국제조사위원회와 배상으로 수습된 사건이다.
2. 전개 과정[편집]
10개 기록 · 1904-10-15 ~ 1906
러시아 발트함대, 리바우 항을 출발해 극동으로 향하다
1904년 10월 15일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이 이끄는 러시아 제2태평양함대(발트함대)가 발트해의 리바우 항을 출발했다. 러일전쟁에서 뤼순항에 고립된 제1태평양함대를 구원하고 제해권을 되찾으려는 대원정이었고, 전함 여러 척과 순양함·수송선이 대열을 이루었다. 출항 전부터 러시아 군 수뇌부는 일본이 유럽 해역에서 어뢰정으로 기습할 것이라는 첩보에 시달리고 있었다. 함대의 승조원들은 장기 항해와 전투 경험 부족으로 극도로 긴장한 상태였다. 이 불안한 분위기가 며칠 뒤 북해에서 벌어질 비극의 배경이 되었다.
북해 일본 어뢰정 출몰 경보가 함대에 전달되다
1904년 10월 20일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은 노르웨이 방면에서 어뢰정들이 출항했다는 보고를 받았고, 어선으로 위장한 어뢰정 4척이 있을 것이라는 정보도 전달받았다. 이에 제독은 함대 전체에 야간 경계를 강화하고 접근하는 정체불명 선박에 경계하라고 지시했다. 실제로는 북해에 일본 어뢰정이 존재한다는 근거가 없었고, 이는 러시아 첩보망의 과잉 해석이었던 것으로 나중에 드러났다. 일부 함정은 안개와 어둠 속에서 서로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채 항해하고 있었다. 경계 태세는 높아졌으나 식별 절차는 허술했다는 점이 이후 조사의 핵심 쟁점이 되었다.
도거뱅크에서 러시아 함대가 헐 트롤 어선단에 포격하다
1904년 10월 22일 새벽 0시 55분경 안개 낀 도거뱅크 해역에서 러시아 함정들이 불빛 없이 떠 있던 배들을 발견하고 탐조등을 비춘 뒤 곧바로 사격을 시작했다. 대상은 영국 헐 항 소속 트롤 어선들로, 약 10분 동안 포격이 이어져 트롤선 크레인호가 침몰하고 선장 조지 헨리 스미스와 3등 항해사 윌리엄 레깃이 숨졌으며 여러 명이 다쳤다. 부상자 가운데 한 명인 월터 휠펠턴 선장은 이듬해 5월 끝내 사망해 사망자는 총 3명이 되었다. 혼란 속에서 러시아 함정끼리도 서로를 오인해 사격해 순양함 오로라호에서 군종 사제와 수병 1명이 아군 포격에 숨졌고, 드미트리 돈스코이호도 피해를 입었다. 러시아 함대는 어선에 구조 조치를 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쪽으로 항해를 계속해 영국의 분노를 키웠다.
영국 여론이 폭발하고 해군이 전쟁 준비에 들어가다
사건이 알려지자 영국 언론은 러시아 함대를 해적에 비유하며 격렬하게 비난했고 타임스는 어선단을 20분 가까이 포격한 자들을 선원이라 부를 수 없다는 취지의 사설을 실었다. 영국 해군은 본국함대 전함 약 28척에 증기를 올리라고 명령하고 순양함 전대를 보내 러시아 함대를 추적하게 했다. 영국은 러시아에 사과와 배상, 책임자 처벌을 공식 요구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과 동맹 관계였던 영국과 러시아의 개전 가능성이 현실적으로 거론되던 순간이었다. 프랑스는 러시아의 동맹이자 영국과의 협상 상대로서 중재에 나서야 하는 곤란한 처지에 놓였다.
러시아 함대, 비고에서 책임 장교를 남기고 출항하다
러시아 함대는 스페인 갈리시아의 비고 항에 기항했고 영국의 압박 속에서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은 사건 당시 지휘 책임이 있는 장교들을 현지에 남기고 11월 1일 출항하기로 했다. 남겨진 장교들은 이후 조사 과정에서 증인으로 활용될 예정이었다. 러시아 정부는 포격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의 뜻을 전했으며 유족과 피해 어민에 대한 보상을 약속했다. 이 조치로 영국은 즉각적인 무력 대응을 보류했지만 일부 영국 내 강경파는 여전히 불만을 드러냈다. 함대는 그 뒤 아프리카를 돌아 극동으로 가는 장기 항로에 올랐다.
영국과 러시아, 국제조사위원회 구성에 합의하다
1904년 11월 25일 영국과 러시아는 이 사건의 진상을 가리기 위해 1899년 헤이그 협약이 규정한 국제조사위원회를 구성하는 공동 선언에 서명했다. 사건의 책임을 법적으로 따지는 대신 사실관계를 국제 기구에 맡기는 방식으로 전쟁 위기를 낮춘 것이다. 위원회는 영국·러시아·프랑스·미국·오스트리아-헝가리 5개국 해군 제독으로 꾸려지기로 했다. 이는 헤이그 평화회의에서 마련된 국제 분쟁 해결 장치가 실제 위기에서 처음 가동된 사례로 평가된다. 영국 내에서는 이 합의가 사실상 러시아에 면죄부를 주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나왔다.
파리에서 국제조사위원회가 심리를 시작하다
1905년 1월 9일 국제조사위원회가 파리에서 열려 영국과 러시아 양측의 주장을 청취하기 시작했다. 영국 측은 어선단이 정상적으로 조업 중이었고 일본 어뢰정은 없었다는 점을 증언과 증거로 제시했다. 러시아 측은 사건 당시 어뢰정으로 보이는 소형선이 접근했다는 장교들의 증언을 내세웠다. 약 7주간 이어진 심리 동안 당시 함대 일지와 목격자 진술이 폭넓게 검토되었다. 이 절차는 언론에 상세히 보도되어 국제 사회가 분쟁 해결 방식의 선례로 주목했다.
위원회 판정, 러시아 포격은 정당화되지 않는다
1905년 2월 25일 위원회는 어선단 가운데 일본 어뢰정은 없었고 러시아 함정이 어선에 대한 포격을 정당화할 만한 근거는 없다고 결론 지었다. 다만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의 군사적 자질과 인도적 면모는 훼손되지 않는다고 하고 그가 어선 피격을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했다고 보았다. 러시아는 약 6만 6천 파운드의 보상금을 피해 어민과 유족에게 지급했다. 영국 정부는 이를 받아들여 위기를 매듭지었고 책임자에 대한 별도 처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판정은 국가 간 무력 충돌 위기를 국제 조사와 배상으로 푼 사례로 평가된다.
발트함대, 쓰시마 해전에서 궤멸하다
도거뱅크 사건을 겪은 러시아 함대는 아프리카를 돌아 7개월 가까이 항해한 끝에 1905년 5월 27일 쓰시마 해협에서 일본 연합함대와 맞붙었다. 이 해전에서 러시아 함대는 전함 대부분을 잃고 사실상 궤멸했으며 로제스트벤스키 제독도 부상 후 포로가 되었다. 도거뱅크 사건 이후 영국과의 관계 악화는 함대의 항해 여건에 부담을 더했다. 쓰시마 패전은 러일전쟁의 승패를 사실상 결정지었고 러시아 내부 혁명 분위기를 키웠다. 도거뱅크 사건은 그 서막에 있었던 외교적 파장으로 기억된다.
헐에 희생 어민 추모비가 세워지다
1906년 영국 헐에 도거뱅크 사건 희생자를 기리는 높이 약 18피트의 추모비가 세워졌다. 기념비에는 스미스 선장과 레깃, 휠펠턴 등 희생자의 이름이 새겨졌다. 헐 시민들은 이 사건을 러시아의 만행이라는 의미에서 러시아 폭거라 불렀고 당시 엽서가 대량으로 팔릴 만큼 대중적 관심이 컸다. 영국과 러시아는 1907년 협상을 맺고 관계를 정상화했다. 이 사건은 오늘날에도 헐 지역 역사에서 어민 참사로 기억된다.
3. 같이 보기[편집]

자주 묻는 질문
- 도거뱅크 사건, 러시아 발트함대의 영국 어선 오인 포격, 어떤 사건인가요?
- 1904년 10월 러일전쟁 중 극동으로 항해하던 러시아 발트함대가 북해 도거뱅크 해역에서 일본 어뢰정으로 착각해 영국 헐 항 트롤 어선단에 포격을 가해 어민 2명이 숨지고 영국과 러시아가 전쟁 직전까지 간 외교 위기로, 국제조사위원회와 배상으로 수습된 사건이다.
- 도거뱅크 사건, 러시아 발트함대의 영국 어선 오인 포격, 언제 일어났나요?
- 1904-10-22부터 1905-02-25까지 이어진 사건입니다.
- 도거뱅크 사건, 러시아 발트함대의 영국 어선 오인 포격, 지금 상태는 어떤가요?
- 종결된 사건입니다. 1905-02-25에 마무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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