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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종결

채퍼퀴딕 사건, 테드 케네디의 차량 추락과 코페치니 익사(1969)

1969-07-18 —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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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969년 7월 18일 밤 매사추세츠주 상원의원 에드워드 케네디가 몰던 차가 채퍼퀴딕 섬 다리에서 연못으로 추락해 동승한 메리 조 코페치니가 숨졌고, 그가 신고를 늦춘 경위를 둘러싼 논란이 케네디의 대권 도전에 평생 영향을 준 스캔들.

2. 전개 과정[편집]

10개 기록 · 1969-07-18 ~ 1980

19695건
  1. 케네디, 채퍼퀴딕 섬에서 로버트 케네디 선거운동원들과 파티를 엶

    1969년 7월 18일 저녁 37세의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은 매사추세츠 앞바다 채퍼퀴딕 섬의 별장에서 사촌 조지프 가건 등과 함께 파티를 열었다. 참석자는 1968년 암살된 로버트 케네디의 선거운동에서 일했던 여성 직원들로, 이들은 '보일러룸 걸스'로 불렸다. 모임은 에드가타운 요트 경기 기간에 맞춰 마련된 것이었다. 이 자리에는 28세의 메리 조 코페치니도 있었다. 이 파티는 이후 사건의 출발점이 되었다.

  2. 케네디가 코페치니를 태우고 파티장을 떠남

    밤 11시 15분경 케네디는 운전기사의 차 열쇠를 요청한 뒤 코페치니를 호텔로 데려다주겠다며 파티장을 떠났다. 이때 코페치니는 소지품을 두고 갔고 다른 참석자들에게 떠난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 케네디는 훗날 페리 선착장으로 가려다 길을 잘못 들었다고 주장했으나 검시 판사는 이 설명을 의심했다. 이 의문은 이후 수십 년간 사건 논쟁의 핵심으로 남았다.

  3. 차량이 다이크 다리에서 포우차 연못으로 추락, 코페치니 익사

    자정 무렵 케네디가 운전하던 올즈모빌 델몬트 88이 비포장도로의 다이크 다리에서 포우차 연못으로 떨어졌다. 차량은 뒤집힌 채 물속에 가라앉았고 코페치니는 차 안에서 익사했다. 케네디는 스스로 빠져나왔으나 즉시 당국에 신고하지 않았다. 앞서 부보안관 크리스토퍼 룩은 새벽 12시 40분경 케네디 차량 번호판과 일치하는 검은 세단이 근처 도로에 있는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신고 지연은 이후 가장 큰 비판 대상이 되었다.

  4. 어부들이 차량 발견, 케네디는 사고 후 약 열 시간 만에 경찰에 출두

    19일 아침 어부들이 연못 속 차량을 발견했고 잠수부 존 파라가 약 10분 만에 코페치니의 시신을 차 뒷좌석에서 수습했다. 같은 날 오전 9시 50분경 케네디는 에드가타운 경찰서에 들어가 자신이 운전자였음을 인정했다. 이는 사고 후 약 아홉 시간 이상이 지난 뒤였고, 그 사이 신고하지 않은 이유를 둘러싼 의혹이 증폭되었다. 케네디는 충격과 혼란 상태였다고 해명했으나 여론은 싸늘했다. 사건은 즉시 전국 뉴스가 되었다.

  5. 케네디, 사고 현장 이탈 유죄 인정과 TV 연설

    1969년 7월 25일 케네디는 사고 후 현장을 이탈한 혐의에 유죄를 인정해 징역 2개월 집행유예와 1년 보호관찰을 선고받았다. 같은 날 저녁 그는 테드 소렌슨이 쓴 연설을 3대 방송사에 생중계하며 유권자에게 사퇴해야 하는지 물었다. 이후 매사추세츠에서는 그를 지지하는 전화와 전보가 쏟아졌고 케네디는 상원직을 유지했다. 그러나 사건의 책임 소재와 진실을 둘러싼 의문은 해소되지 않았다.

19703건
  1. 에드가타운 비공개 검시 심문, 판사는 케네디의 부주의 가능성 지적

    1970년 1월 제임스 보일 판사 주재로 에드가타운에서 비공개 검시 심문이 열렸다. 보일 판사는 케네디가 다리의 위험을 알았을 가능성이 크며 과속 등 부주의하게 운전했다고 판단했고, 두 사람이 페리를 타려던 것은 아니었다고 보았다. 심문 기록은 763쪽에 이르렀고 몇 달 뒤 공개되었다. 이 판단은 케네디의 '길을 잘못 들었다'는 설명에 의문을 던졌다. 다만 판사의 결론은 형사 기소로 직접 이어지지는 않았다.

  2. 대배심, 과실치사 기소 없이 종결

    1970년 4월 6일 듀크스 카운티 대배심이 소집되었으나 에드먼드 디니스 지방검사는 과실치사 혐의를 적용할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보고했다. 대배심은 케네디를 기소하지 않았고 사건의 형사 절차는 사실상 끝났다. 이에 따라 케네디는 형사 처벌을 더 받지 않았다. 그러나 도덕적·정치적 책임 논란은 계속되었다. 주 당국은 한편으로 면허 문제를 별도로 다루었다.

  3. 케네디, 1970년 상원 재선에서 승리했으나 득표율 하락

    1970년 11월 선거에서 케네디는 상원의원에 재선되었다. 그러나 득표율은 62%로 1964년의 74%에서 크게 하락했다. 사건이 유권자에게 미친 영향이 수치로 나타난 셈이다. 그는 이후에도 상원에서 활동했지만 대통령 도전 가능성에 대한 기대는 약해졌다. 그는 1972년과 1976년 대선에는 출마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19791건
  1. CBS 특집 '테디' 인터뷰가 케네디 대선 도전에 타격을 줌

    1979년 11월 4일 CBS는 로저 머드와 케네디의 1시간 인터뷰 특집 '테디'를 방영했다. 머드가 채퍼퀴딕 사건에 관해 집요하게 묻자 케네디는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방송은 그의 1980년 대선 출마 초기 국면에 큰 정치적 타격을 준 것으로 평가된다. 사건 발생 10년이 지났음에도 사건이 여전히 그의 발목을 잡고 있음을 보여준 장면이었다.

19801건
  1. 1980 민주당 경선에서 카터에게 패배

    케네디는 1980년 민주당 대선 경선에 도전했으나 현직 지미 카터 대통령에게 패했고 득표율은 37.6%에 그쳤다. 사건 직전만 해도 그는 유력한 차기 대통령 후보로 여겨졌다. 채퍼퀴딕 사건은 그의 신뢰성과 도덕성 문제를 낳았고, 이는 대권 도전 좌절의 중요한 배경으로 꼽힌다. 케네디는 이후 상원에서 장기간 활동하며 입법가로 평가받았다.

3. 같이 보기[편집]

분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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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묻는 질문

채퍼퀴딕 사건, 테드 케네디의 차량 추락과 코페치니 익사(1969), 어떤 사건인가요?
1969년 7월 18일 밤 매사추세츠주 상원의원 에드워드 케네디가 몰던 차가 채퍼퀴딕 섬 다리에서 연못으로 추락해 동승한 메리 조 코페치니가 숨졌고, 그가 신고를 늦춘 경위를 둘러싼 논란이 케네디의 대권 도전에 평생 영향을 준 스캔들.
채퍼퀴딕 사건, 테드 케네디의 차량 추락과 코페치니 익사(1969), 언제 일어났나요?
1969-07-18부터 1980까지 이어진 사건입니다.
채퍼퀴딕 사건, 테드 케네디의 차량 추락과 코페치니 익사(1969), 지금 상태는 어떤가요?
종결된 사건입니다. 1980에 마무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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