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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텐 청문회와 할리우드 블랙리스트 사태 (1947~1960)

1947-09-27 — 1960-10-06

최종 갱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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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947년 하원 비미활동위원회(HUAC)가 할리우드 영화인의 공산주의 연루를 조사하자 각본가·감독 10명이 증언을 거부해 의회모독으로 유죄를 받았고, 영화업계가 월도프 성명으로 이들을 퇴출하며 수백 명이 일자리를 잃는 블랙리스트 시대가 1960년 트럼보 복귀까지 이어졌다.

2. 전개 과정[편집]

10개 기록 · 1947-09-27 ~ 1960-10-06

19474건
  1. HUAC, 할리우드 인사 19명에 소환장 발부

    1947년 9월 27일 하원 비미활동위원회는 영화 산업 내 공산주의 영향력을 조사한다며 영화인 19명에게 청문회 출석을 요구하는 소환장을 발부했다. 냉전이 본격화되던 당시 미국 정치권은 소련과 연계된 공산주의 침투를 영화가 전파한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소환 대상에는 각본가와 감독, 제작자가 포함됐고 상당수는 좌파 성향 활동 경력이 있었다. 위원회는 영화 내용에 선전이 포함되었는지 검증하겠다고 밝혔다. 이 조사는 이후 매카시즘 시대의 서막으로 평가된다.

  2. 청문회에서 10명 증언 거부, 헌법 수정 제1조 주장

    1947년 10월 청문회에는 월트 디즈니, 아인 랜드, 잭 워너 같은 '우호적 증인'들이 먼저 출석해 할리우드 내 공산주의자 활동을 증언했다. 이후 10월 27일부터 소환된 이른바 '비우호적 증인' 가운데 10명이 공산당 가입 여부를 묻는 질문에 대답하길 거부했다. 이들은 질문 자체가 표현·결사의 자유를 보장한 수정헌법 제1조에 어긋난다고 주장했다. 이 열 명이 '할리우드 텐'으로 불리게 된다. 위원장 J. 파넬 토머스는 이들을 퇴장시켰고 의회모독 절차로 이어졌다.

  3. 하원, 346대 17로 할리우드 텐 의회모독 결의

    1947년 11월 24일 미국 하원은 346대 17의 압도적 표 차로 할리우드 텐을 의회모독 혐의로 기소하는 결의안을 가결했다. 대상은 앨바 베시, 허버트 비버만, 레스터 콜, 에드워드 드미트릭, 링 라드너 주니어, 존 하워드 로슨, 앨버트 말츠, 새뮤얼 오니츠, 에이드리언 스콧, 돌턴 트럼보였다. 이들은 의회가 헌법 범위를 넘어 개인의 사상을 심문한다고 주장했지만 하원의 표결로 형사 절차가 시작되었다. 이 결의로 열 명은 곧 형사법정에 서게 되었다. 영화계는 정치적 압박에 어떻게 대응할지 분열되었다.

  4. 월도프 성명, 영화업계가 열 명을 공식 퇴출

    1947년 11월 25일 영화협회 회장 에릭 존스턴과 주요 스튜디오 경영진 48명은 뉴욕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회의를 열고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의회모독 혐의를 받은 열 명을 무급 정직하고 무혐의가 입증될 때까지 고용하지 않으며 공산주의자는 채용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것이 사실상 최초의 공식 블랙리스트였다. 스튜디오는 정치적 압박과 흥행 부진에 대한 두려움을 이유로 들었다. 이후 수백 명의 영화인이 사상 조사에 휘말려 일자리를 잃게 된다.

19481건
  1. 할리우드 텐 의회모독 재판 유죄

    1948년 존 하워드 로슨과 돌턴 트럼보를 시작으로 열 명 모두가 연방 법원에서 의회모독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벌금은 1천 달러씩이었고 징역형은 6개월에서 1년이었다. 변호인단은 위원회 조사가 위헌이라는 주장을 폈으나 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항소 과정에서도 같은 논리가 반복되었으나 판결은 유지되었다. 영화계에서 활동하던 204명이 열 명을 지지하는 법정 의견서에 서명했고 그중 84명이 훗날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19502건
  1. 대법원 상고 기각, 열 명 수감

    1950년 연방대법원이 할리우드 텐의 상고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유죄가 확정되었고, 이들은 그해 중반부터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형기는 6개월에서 1년이었으며 로슨과 트럼보 등은 최장 1년형을 선고받았다. 감독 에드워드 드미트릭은 이후 공산당 전력을 밝히고 위원회에 협조해 일찍 풀려났다. 출소한 영화인들은 영화계에서 일자리를 찾지 못했다. 많은 사람이 가명이나 대리인을 내세워 작업하는 지하 시장에서 생계를 이어 갔다.

  2. 레드 채널스 발간, 151명 방송·영화인 지목

    1950년 6월 22일 반공 단체 '카운터어택'이 소책자 '레드 채널스'를 발간해 방송과 연예계 종사자 151명을 공산주의 동조자로 지목했다. 이 목록에 오른 이들은 방송사와 광고주의 압력으로 출연이나 작업 기회를 잃었다. 근거가 약한 정보도 다수 포함돼 있었고 반론의 기회는 거의 없었다. 블랙리스트는 문서로 공식화되지 않은 채 암묵적 관행으로 작동했다는 점에서 구제가 어려웠다. 이 목록은 영화를 넘어 라디오와 TV로 숙청이 확산되었음을 보여 준다.

19521건
  1. 엘리아 카잔 등 동료 이름 증언, 영화계 분열

    1952년 4월 영화감독 엘리아 카잔은 HUAC에 출석해 과거 공산당 가입 사실과 동료들의 이름을 증언했다. 작가 버드 슐버그 같은 인물도 비슷하게 이름을 대 수십 명의 경력이 끊겼다. 이후 카잔은 '워터프런트'로 오스카를 받았지만 동료 영화인들의 비난과 갈등이 이어졌다. 이름을 댄 사람들 중에는 훗날 후회를 표한 이도 있었다. 이 시기 청문회는 협조 여부가 곧 생존을 가르는 압박 수단으로 작동했다.

19602건
  1. 프레민저, 트럼보를 '엑소더스' 각본가로 공개

    1960년 1월 20일 감독 오토 프레민저는 영화 '엑소더스'의 각본을 돌턴 트럼보가 썼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트럼보는 수년간 '로버트 리치'라는 가명으로 '용감한 자' 등을 써 아카데미상까지 받았지만 본명으로는 작업하지 못했다. 이 발표는 블랙리스트에 대한 공개적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업계는 이미 정치적 위험이 약해졌다고 판단하기 시작했다. 같은 시기 커크 더글러스도 '스파르타쿠스' 크레디트에 트럼보 이름을 쓰겠다고 밝혔다.

  2. '스파르타쿠스' 개봉, 트럼보 실명 크레디트 복귀

    1960년 10월 6일 개봉한 '스파르타쿠스'에는 돌턴 트럼보가 각본가로 실명 표기되었다. 1950년 이후 그가 본명으로 올린 첫 크레디트였다. 같은 해 12월 개봉한 '엑소더스'에도 그의 이름이 올랐다. 이 두 작품으로 블랙리스트는 사실상 힘을 잃었지만 공식 폐지 선언은 없었다. 이후 작가조합은 수십 년에 걸쳐 가명으로 쓴 작품의 크레디트를 복원했다. 2011년에는 '로마의 휴일' 각본 크레디트가 트럼보에게 복원되었다.

3.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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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묻는 질문

할리우드 텐 청문회와 할리우드 블랙리스트 사태 (1947~1960), 어떤 사건인가요?
1947년 하원 비미활동위원회(HUAC)가 할리우드 영화인의 공산주의 연루를 조사하자 각본가·감독 10명이 증언을 거부해 의회모독으로 유죄를 받았고, 영화업계가 월도프 성명으로 이들을 퇴출하며 수백 명이 일자리를 잃는 블랙리스트 시대가 1960년 트럼보 복귀까지 이어졌다.
할리우드 텐 청문회와 할리우드 블랙리스트 사태 (1947~1960), 언제 일어났나요?
1947-09-27부터 1960-10-06까지 이어진 사건입니다.
할리우드 텐 청문회와 할리우드 블랙리스트 사태 (1947~1960), 지금 상태는 어떤가요?
종결된 사건입니다. 1960-10-06에 마무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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