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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외교종결

1992년 LA 폭동과 코리아타운 피해 (4·29 사이구)

1992-04-29 — 1992-05-04

최종 갱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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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992년 4월 29일 흑인 로드니 킹을 폭행한 백인 경관들의 무죄 평결을 계기로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폭동이 발생, 코리아타운이 집중 약탈·방화 표적이 됐다. 경찰의 방치 속에 한인 상인들은 무장 자경에 나섰고, 약 2,300개 한인 업소가 피해를 입어 재산 손실이 3억5천만 달러에 달했다.

2. 전개 과정[편집]

7개 기록 · 1991-03-03 ~ 1993-04-17

19912
  1. 로드니 킹 집단폭행 사건

    1991년 3월 3일 로스앤젤레스에서 백인 교통경찰관들이 과속으로 도주하던 흑인 운전자 로드니 킹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무차별 구타를 가했다. 인근 주민이 이 장면을 비디오로 촬영해 방송에 공개하면서 미국 전역이 경악했다. 영상 속에서 경관들은 쓰러진 킹을 곤봉으로 수십 차례 내리치고 발로 짓밟았다. 이 사건은 미국 내 인종차별과 경찰 폭력 문제를 상징하는 도화선이 됐다. 흑인 사회는 경관들의 처벌을 강력히 요구했고, 사건은 곧 형사재판으로 이어졌다.

  2. 두순자, 흑인 소녀 라타샤 할린스 사살

    1991년 3월 16일 한국 출신 이민자 두순자가 자신이 운영하던 상점에서 15세 흑인 소녀 라타샤 할린스를 총으로 쏴 숨지게 했다. 두순자는 할린스가 오렌지주스를 훔치려 한다고 오인해 몸싸움 끝에 권총을 발사한 것으로 조사됐다. 그러나 매장 폐쇄회로 영상에는 할린스가 손에 돈을 쥔 채 계산하려던 정황이 담겨 있었다. 배심원은 두순자에게 유죄를 평결했지만, 담당 판사는 재범 가능성이 낮다는 이유로 집행유예와 사회봉사 명령만 선고했다. 이 관대한 판결은 흑인 사회의 분노를 키웠고, 한흑 갈등의 골을 깊게 파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19924
  1. 경관 무죄 평결·폭동 발발, 코리아타운 표적

    1992년 4월 29일 로드니 킹을 폭행한 경관 4명 중 3명에게 무죄, 1명에게는 판단 유보 평결이 내려졌다. 명백한 영상 증거에도 백인 경관들이 사실상 면죄부를 받자 흑인 사회의 분노가 폭발해 대규모 폭동으로 번졌다. 분노한 군중은 방화와 약탈을 일삼았고, 특히 한인 상권이 밀집한 코리아타운이 집중 표적이 됐다. 앞서 두순자 사건으로 쌓인 한흑 갈등이 겹치면서 한인 업소가 무차별 약탈·방화의 대상이 됐다. 순식간에 코리아타운은 화염과 총성이 뒤덮인 무법천지로 변했다.

  2. 경찰 방치 속 한인 무장 자경 — '루프탑 코리안'

    폭동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동안 로스앤젤레스 경찰은 한정된 인력을 베벌리힐스와 할리우드 등 부유층·백인 거주지 방어에 집중 배치했다. 반면 한인 상점이 몰린 코리아타운은 사실상 치안 공백 상태로 방치됐다. 공권력의 보호를 받지 못한 한인 상인들은 상점 옥상 등에 진지를 구축하고 스스로 총을 들어 재산과 생명을 지켰다. 상점 지붕 위에서 무장한 채 폭도에 맞선 이들의 모습은 '루프탑 코리안(Rooftop Koreans)'으로 불리며 상징적 장면으로 남았다. 그러나 미국 주류 언론은 이들을 '허가받지 않은 총을 든 또 다른 난동자'로 묘사해 교민사회의 분노를 샀다.

  3. 유일한 한인 희생자 이재성 오인사격 사망

    폭동 와중에 코리아타운을 지키던 18세 청년 이재성(에드워드 송 리)이 총에 맞아 숨졌다. 그는 한인 자경단의 일원으로 상권 방어에 나섰다가 다른 한인들이 그를 폭도로 착각해 벌인 오인사격에 희생된 것으로 알려졌다. 서로를 적으로 오인할 만큼 극심한 혼란과 공포가 코리아타운을 지배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비극이었다. 이재성은 LA 폭동으로 목숨을 잃은 유일한 한인 희생자로 기록됐으며, 가해자는 끝내 처벌받지 않았다. 훗날 그의 흉상 건립과 추모 사업이 추진되며 한인사회의 상처를 상징하는 이름이 됐다.

  4. 폭동 진정·한인 피해 집계

    연방군과 주방위군 투입으로 폭동은 5월 4일경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다. 엿새간 이어진 폭동으로 50여 명이 숨지고 수천 명이 다쳤으며, 재산 피해는 7억 달러를 넘어섰다. 이 가운데 한인 업소 피해액이 약 3억5천만 달러로 전체의 절반에 육박했고, 약 2,300개 한인 상점이 약탈되거나 불에 탔다. 코리아타운 상권의 상당 부분이 초토화되면서 한인 이민사회는 회복하기 힘든 타격을 입었다. 공권력의 외면과 주류 언론의 편향된 보도를 겪은 한인들은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는 뼈아픈 교훈을 얻었다.

19931
  1. 연방재판서 경관 2명 유죄 — 한인사회 각성

    폭동을 촉발한 주 법원 평결과 달리, 1993년 연방정부는 로드니 킹의 시민권을 침해한 혐의로 경관들을 다시 기소했다. 연방 재판에서 경관 4명 중 2명이 유죄 판결을 받아 각각 징역 30개월을 선고받았고, 나머지 2명은 무죄가 선고됐다. 이번에는 별다른 소요 없이 재판이 마무리되며 사태는 일단락됐다. LA 폭동은 재미 한인사회에 정치적 무관심과 주류사회와의 단절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르게 하는지 뼈저리게 각인시켰다. 이후 한인사회는 유권자 등록과 정치 참여, 타 인종과의 연대에 적극 나서며 커뮤니티의 목소리를 키우는 전환점을 맞았다.

3.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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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묻는 질문

1992년 LA 폭동과 코리아타운 피해 (4·29 사이구), 어떤 사건인가요?
1992년 4월 29일 흑인 로드니 킹을 폭행한 백인 경관들의 무죄 평결을 계기로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폭동이 발생, 코리아타운이 집중 약탈·방화 표적이 됐다. 경찰의 방치 속에 한인 상인들은 무장 자경에 나섰고, 약 2,300개 한인 업소가 피해를 입어 재산 손실이 3억5천만 달러에 달했다.
1992년 LA 폭동과 코리아타운 피해 (4·29 사이구), 언제 일어났나요?
1992-04-29부터 1992-05-04까지 이어진 사건입니다.
1992년 LA 폭동과 코리아타운 피해 (4·29 사이구), 지금 상태는 어떤가요?
종결된 사건입니다. 1992-05-04에 마무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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